약자는 본래부터 약자가 아니요, 강자 또한 언제까지나 강자일 수 없는 것이다. 갑자기 천하의 운수가 바뀔 때에는 침략 전쟁의 뒤꿈치를 물고 복수를 위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니 침략은 반드시 전쟁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 평화를 위한 전쟁이 있겠으며, 또 어찌 자기 나라의 수천 년 역사가 외국의 침략에 의해 끊기고, 몇백, 몇천만의 민족이 외국인의 학대 하에 노예가 되고 소와 말이 되면서 이를 행복으로 여길 자가 있겠는가.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문명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피가 없는 민족은 없는 법이다. 이렇게 피를 가진 민족으로서 어찌 영구히 남의 노에가 됨을 달게 받겠으며 나아가 독립 자존을 도모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군국주의, 즉 침략주의는 인류의 행복을 희생시키는 가장 흉악한 마술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이같은 군국주의가 무궁한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이론보다 사실이 그렇다. 칼이 어찌 만능이며 힘을 어떻게 승리라 하겠는가. 정의가 있고 도의가 있지 않는가.
침략만을 일삼는 극악 무도한 군국주의는 독일로써 그막을 내리지 않았는가. 귀신이 곡하고 하늘이 슬퍼한 구라파 전쟁은 대략 1천만의 사상자를 내고, 몇 억의 돈을 허비한 뒤 정의와 인도를 표방하는 기치 아래 강화 조약을 성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군국주의의 종말은 실로 그 빛깔이 찬란하기 그지없었다.
전세계를 유린하려는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노심 초사 20년간에 수백만의 청년을 수백 마일의 싸움터에 배치하고 장갑차와 비행기와 군함을 몰아 좌충 우돌, 동쪽을 찌르고 서쪽을 쳐 싸움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파리를 함락한다고 스스로 외치던 카이제르의 호언은 한때 장엄함을 보였었다. 그러나 이것은 군국주의의 결별을 뜻하는 종곡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과 호언 장담뿐이 아니라 독일의 작전 게획도 실로 탁월하였다. 휴전 회담을 하던 날까지 연합국측의 군대는 독일 국경을 한 발자국도 넘지 못하였으니 비행기는 하늘에서, 잠수함은 바다에서, 대포는 육지에서 각각 그 위력을 발휘하여 싸움터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군국주의적 낙조의 반사에 불과하였다.
아아, 1억만 인민의 머리 위에 군림하고, 세계를 손아귀에 넣을 것을 다짐하면서 세게에 선전 포고했던 독일 황제. 그리하여 한때는 종횡 무진으로 백전 백승의 느낌마저 들게 했던 독일 황제가 하루 아침에 생명이나 하늘처럼 여기던 칼을 버리고 처량하게도 멀리 화란 한 구석에서 겨우 목숨만을 지탱하게 되었으니 이 무슨 돌변이냐. 이는 곧 카이제르의 실패일 뿐 아니라 군국주의의 실패로서 통쾌함을 금치 못하는 동시에 그 개인을 위해서는 한가닥 동정을 아끼지 않는 바이다.
그런데 연합국측도 독일의 군국주의를 타파한다고 큰소리 쳤으나 그 수단과 방법은 역시 군국주의의 유물인 군함과 총포 등의 살인 도구였으니 오랑캐로서 오랑캐를 친다는 점에서는 무엇이 다르겠는가. 독일의 실패가 연합국의 전승을 말함이 아닌즉 많은 강대국과 약소국이 합력하여 5년간의 지구전으로도 독일을 제압하지 못한 것은 이 또한 연합국측 준군국주의의 실패가 아닌가.
그러면 연합국측의 대포가 강한 것이 아니었고 독일의 칼이 약한 것이 아니었다면 어찌하여 전쟁이 끝나게 되었는가. 정의와 인도의 승리요, 군국주의의 실패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와 인도, 즉 평화의 신이 독일 국민과 손을 잡고 세계의 군국주의를 타파한 것이다. 그것이 곧 전쟁 중에 일어난 독일의 혁명이다.
독일 혁명은 사회당의 손으로 이룩된 것인 만큼 그 유래가 오래고 또한 러시아 혁명의 자극을 받은 바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총괄적으로 말하면, 전쟁의 쓰라림을 느끼고 군국주의의 잘못을 통감한 사람들이 전쟁을 스스로 파기하고 군국주의 칼을 분질러 그 자살을 도모함으로써 공화 혁명의 성공을 얻고 평화적인 새 운명을 개척한 것이다. 연합국은 이 틈을 타 어부지리를 얻는 데 불과하다.